[메르 라솜(мир разом), 다함께 평화] ⑤우크라이나 고려인 가족의 피난길

알미라 텐(Almira Ten·60) 씨는 한국에 도착한 날부터 매일 꿈을 꾼다. 꿈속에서 그녀는 비좁은 차를 타고 있다. 손녀를 무릎에 앉힌 채 창밖을 걱정스레 살핀다. 그리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포탄 소리에 화들짝 놀라 꿈에서 깬다. 알미라 씨는 3월 21일, 우크라이나 전쟁을 피해 며느리, 손주 3명을 데리고 한국으로 들어왔다. 남편 유리 리(Yuri Li·67) 씨는 아직 우크라이나에 남아있다.

이들이 세계 곳곳을 이주한 역사는 아주 오래됐다. 1937년 당시 소비에트연방 시절의 스탈린은 극동의 연해주에 살던 고려인들을 서쪽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알미라 씨의 부모는 짐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 수송되는 기차에 올랐다. 이들 가족은 3년 뒤에 영문을 모른 채 또다시 우크라이나로 강제 이주됐다. 어릴 적 어머니, 아버지에게 전해 들었던 그 이야기가 이제 자신의 이야기가 됐다고 알미라 씨는 <단비뉴스> 기자에게 말했다. 손자들에게까지 아픈 역사를 대물려 주고 싶지 않다고, 그래서 인터뷰에 응하는 것이라고 했다.

알미라 텐(Almira Ten) 씨가 경기도 안산에서 단비뉴스와 인터뷰 하고 있다. ⓒ 박시몬
알미라 텐(Almira Ten) 씨가 경기도 안산에서 단비뉴스와 인터뷰 하고 있다. ⓒ 박시몬

전쟁이 시작되다

알미라 씨는 1961년 우즈베키스탄에서 태어난 고려인이다. 세 살 무렵 부모와 함께 우크라이나로 옮겨 왔다. 스무 살 때 함께 수박 농장에서 일하던 고려인 유리(67) 씨를 만나 연애 후 결혼했다. 부부는 집에서 고려인 전통 음식인 마르코프차(당근 김치)를 담가 주변 시장에 팔았다. 아들 미하엘 리(Mykhailo Li·40) 씨도 러시아 출신의 고려인을 만나 결혼했다. 며느리가 된 그녀는 옐레나 킴(Elena Kim·38) 씨다. 아들 미하엘 씨와 며느리 옐레나 씨는 유리(Yuri Li·14)와 아나(Anna Li·10)를 낳았다. 온 가족이 함께 지내기를 꿈꾸었던 남편 유리 씨는 우크라이나 미콜라이우(Mykolaiv)에 큰 집 하나를 제 손으로 직접 지었다. 미콜라이우는 고려인들이 모여 사는 도시다. 미콜라이우 주지사 비탈리 김(Vitaliy Kim) 씨도 고려인이다. 알미라 씨는 생각했다. 젊은 날 남 부끄럽지 않게 열심히 살았으니, 이제 그 집에서 여생을 평화롭게 보낼 일만 남았다고. 그리고 2022년 2월, 전쟁이 발발했다.

알미라 씨의 남편 유리 씨는 가족과 함께 살 집을 우크라이나 미콜라이우에 직접 지었다. ⓒ 알미라 텐
알미라 씨의 남편 유리 씨는 가족과 함께 살 집을 우크라이나 미콜라이우에 직접 지었다. ⓒ 알미라 텐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전, 알미라 씨의 가족과 이웃들은 함께 사진을 찍었다. 사진의 오른쪽 흰색 셔츠를 입고 여자아이를 안고 있는 사람이 알미라 씨의 남편 유리 씨다. 유리 씨의 옆에서 아이를 함께 안고 있는 사람은 알미라 씨, 그리고 그들이 안은 여자아이는 손녀 아나다. 알미라 씨의 오른편에는 며느리 옐레나 씨가 손자 유리를 안고 서 있다. ⓒ 알미라 텐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전, 알미라 씨의 가족과 이웃들은 함께 사진을 찍었다. 사진의 오른쪽 흰색 셔츠를 입고 여자아이를 안고 있는 사람이 알미라 씨의 남편 유리 씨다. 유리 씨의 옆에서 아이를 함께 안고 있는 사람은 알미라 씨, 그리고 그들이 안은 여자아이는 손녀 아나다. 알미라 씨의 오른편에는 며느리 옐레나 씨가 손자 유리를 안고 서 있다. ⓒ 알미라 텐

미콜라이우는 헤르손(Kherson)과 오데사(Odessa) 사이에 위치한 항구도시다. 돈바스 지역과 헤르손을 차례로 점령한 러시아군 입장에서는 최대 물류 거점인 오데사(Odessa)로 건너가기 위해 반드시 미콜라이우를 거쳐야 한다. 도시에는 남부크강(Southern Bug River)과 인훌강(Inhul River)이 흐르고 있다. 인훌강을 통해 우크라이나 군이 외부의 물자를 조달 받고, 남부크강은 흑해(Black Sea)와 연결되어 있다. 러시아군은 이곳을 점령해야만 우크라이나 남동부지역으로 나아갈 수 있고 우크라이나 해군의 전력을 약화할 수 있다. 침공 첫날부터 러시아 군은 미콜라이우에 집중 공격을 가했다.

미콜라이우는 러시아 군대가 우크라이나 최대 물류 거점인 오데사 지역으로 넘어가기 위한 길목에 자리하고 있다. ⓒ 서현재
미콜라이우는 러시아 군대가 우크라이나 최대 물류 거점인 오데사 지역으로 넘어가기 위한 길목에 자리하고 있다. ⓒ 서현재

2월 24일 새벽 5시경, 러시아가 미콜라이우 국제공항에 폭격을 시작했다. 알미라 씨의 집은 공항에서 15킬로미터(km) 정도 떨어져 있었다. 창문이 깨질 듯한 거센 바람 소리에 알미라 씨 가족은 잠에서 깼다. 처음에는 자동차 소리인 줄 알았다. 뒤이어 사이렌 소리와 함께 공습경보가 울렸다. 전쟁이었다. 남편 유리와 손자 유리는 거세게 흔들리고 있는 창문 틈새를 테이프로 모두 막았다. 알미라 씨와 며느리 옐레나 씨는 가족의 여권과 중요 문서들을 보이는 대로 가방에 집어넣었고, 자고 있는 막내 손녀 아나를 업고 지하실로 급하게 내려가 대피했다.

2월 24일 아침, 우크라이나의 미콜라이우 국제공항이 러시아의 폭격을 받아 연기가 나고 있는 장면을 알미라 씨의 손녀 리사가 집에서 촬영했다. ⓒ 리사 리카라타이
2월 24일 아침, 우크라이나의 미콜라이우 국제공항이 러시아의 폭격을 받아 연기가 나고 있는 장면을 알미라 씨의 손녀 리사가 집에서 촬영했다. ⓒ 리사 리카라타이

몇 시간 후, 사이렌이 잦아들자 전쟁의 공포가 본격적으로 밀려왔다. 언제든 고립되어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느리 옐레나 씨가 가족을 위해 먹을 음식과 생필품을 사러 집 앞 마트에 나갔다. 마트에는 사람이 붐볐다. 매대에 남아있는 음식과 물건을 닥치는 대로 담았다. 고기 통조림 몇 개, 밀가루, 통곡물 시리얼, 화장지, 여성용품 몇 개를 겨우 건졌다. 집에 쌀이 좀 남아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마트의 물건은 순식간에 동이 났다. 마트 주인은 현금만 받았다. 마트 현금인출기(ATM) 앞에는 사람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공습경보가 울렸다. 경보가 울릴 때마다 지하실로 대피했다. 지하실로 내려갈 때마다 두려움에 떨었다. 혹여나 폭격에 집이 무너져 지하에 갇힐까 무서웠다. 전쟁이 나기 전, 지하실은 음식을 보관하는 창고로 쓰이던 곳이었다. 지하실의 온도는 감자와 토마토를 신선하게 유지할 정도로 서늘했다. 그러나 사람이 지내기엔 추웠다. 말할 때마다 하얀 입김이 나왔다. 남편 유리 씨는 막내 손녀 아나를 위해 작은 난방기를 위층에서 가져왔다. 모두가 추위와 불안에 떨며 뜬눈으로 밤을 보냈다. 시간이 갈수록 가족은 점점 지쳐갔다. 지하실에서 아이들은 더 이상 러시아 말을 하지 않았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전쟁의 주도자가 누구인지 알게 된 것이다. 아이들은 우크라이나어를 쓰기 시작했다.

공습경보가 울릴 때 마다 알미라 씨의 가족은 추운 지하실로 대피하며 불안에 떨었다. ⓒ 알미라 텐
공습경보가 울릴 때 마다 알미라 씨의 가족은 추운 지하실로 대피하며 불안에 떨었다. ⓒ 알미라 텐

탈출을 시도하다

가까운 방공호로 대피할 수만 있다면 좋았겠지만, 가장 가까운 곳도 가족 전체가 걸어서 가기에는 너무 멀었다. 아이들을 위해서 우크라이나 탈출을 결심했다. 아들 미하엘 씨는 광주광역시 태양광판 제조공장에서 2021년 11월부터 일하고 있었다. 미하엘 씨와 상의해 한국으로 탈출할 계획을 세웠다. 아들은 믿을만한 친구를 집으로 보내겠다고 했다. 짐을 쌌다. 여정이 얼마나 길어질지 장담할 수 없었다. 아이들 옷 몇 벌, 신분을 증명할 문서들, 여권, 통조림과 만두 몇 개를 챙겼다. 어른들의 짐은 거의 챙기지 않았다.

우크라이나에서 탈출한 후, 경기도 안산에 머물고 있는 알미라 씨의 집에서 아들 미하엘씨가 단비뉴스에게 여권을 보여주며 탈출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 박시몬
우크라이나에서 탈출한 후, 경기도 안산에 머물고 있는 알미라 씨의 집에서 아들 미하엘씨가 단비뉴스에게 여권을 보여주며 탈출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 박시몬

3월 6일, 처음으로 탈출을 시도했다. 그날 아침에는 공습경보가 울리지 않았다. 다음 경보가 울리기 전에 출발해야 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손자 유리의 여권이 보이지 않았다. 가족 전부가 집 안을 샅샅이 뒤졌다. 지하실 구석에서 여권을 찾았을 때는 이미 저녁이 된 후였다. 그렇게 첫 번째 탈출 시도는 실패했다. 두 번째 시도는 그다음 날인 3월 7일이었다. 그날은 공습경보 사이렌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잦아들기를 기다렸지만, 해가 지도록 포격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두 번째 시도도 결국 실패에 그쳤다. 세 번째 시도는 3월 8일이었다.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아침부터 알미라 씨의 가족은 나갈 채비를 마쳤다. 아침 9시, 아들 미하엘 씨가 보낸 친구가 집 앞에 차를 몰고 와 기다리고 있었다.

남편 유리 씨는 우크라이나에 남겠다고 했다. 고려인의 피가 흐르고 있지만,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한국은 그에게 낯선 나라였다. 그는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났고, 우크라이나인으로서 자신의 조국에서 죽겠다고 했다. 비록 자신의 부모님은 전쟁 때문에 살던 곳에서 강제로 쫓겨났지만, 자신은 당신의 두 손으로 직접 지은 이 집을 끝까지 지키겠다고 했다. 알미라 씨는 차마 남편을 말릴 수 없었다. 집 밖을 나서기 전 알미라 씨는 남편에게 말했다. “다 잘 될 거야, 곧 돌아올게.” 남편은 대답했다. “그래, 기다리고 있을게.” 결혼 생활 40년을 넘긴 노부부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인사를 나눴다.

알미라 씨의 남편 유리 씨는 전쟁을 피해 한국으로 돌아간 가족들과 달리 자신의 고국 우크라이나에 남기로 결정했다. ⓒ 알미라 텐
알미라 씨의 남편 유리 씨는 전쟁을 피해 한국으로 돌아간 가족들과 달리 자신의 고국 우크라이나에 남기로 결정했다. ⓒ 알미라 텐

우크라이나 국경을 넘다

한국에서 일하던 아들 미하엘 씨는 3월 7일 루마니아 수도 부쿠레슈티(Bucharest)에 도착해 미리 알미라 씨의 가족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콜라이우 주변 나라 중 폴란드와 루마니아 두 곳에만 한국 대사관이 있었다. 폴란드에 가려면 사흘 동안 차를 타고 가야 했기 때문에 너무 멀고 위험했다. 그들은 미콜라이우에서 가장 가까운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미하엘 씨 친구의 차는 초록색 쉐보레 아베오(Chevrolet Aveo), 작은 경차였다. 짐 가방 두 개를 들고 가족 4명이 뒷좌석에 몸을 구겨 넣었다. 공항 근처에서 따로 살던 손녀 리사(Lisa Likaratai·13)도 태웠다.

알미라 씨의 가족은 한국 대사관이 있는 루마니아로 건너가기 위해 미콜라이우에서부터 루마니아 접경지역인 오를리브카 까지 남서쪽으로 426km 이동했다 ⓒ 서현재
알미라 씨의 가족은 한국 대사관이 있는 루마니아로 건너가기 위해 미콜라이우에서부터 루마니아 접경지역인 오를리브카 까지 남서쪽으로 426km 이동했다 ⓒ 서현재

그들은 먼저 우크라이나-루마니아 접경지역인 오를리브카(Orlivka)로 향했다. 가는 길에 검문소 몇 곳을 지났다. 검문소를 지날 때마다 우크라이나 군인들이 총을 들고 지키고 있었다. 알미라 가족은 매번 러시아 스파이가 아님을 증명해야 했다. 다행히도 군인들은 차 안의 아이들을 보곤 비교적 금방 보내주었다. 그들은 미콜라이우에서 오를리브카까지 426km를 쉬지 않고 달렸다. 교통체증이 30분, 1시간씩 있었지만, 전쟁의 공포에 비하면 대수롭지 않았다. 중간에 배가 고프면 통조림과 물을 조금씩 먹었다. 저녁 6시가 다 되어 오를리브카에 도착했다.

오를리브카에는 루마니아 접경 도시 이사체아(Isaccea)로 건너갈 수 있는 페리가 있었다. 전쟁 발발 이후, 루마니아 정부는 모든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페리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피난민을 실은 페리는 일정한 시간에 출발하지 않았다. 사람이 차면 그때그때 출발했다. 선착장에서 3시간쯤 기다렸을까. 밤 9시가 되어 페리가 출발했다. 페리 안에는 1000명이 넘는 우크라이나 피난민들이 타고 있었다. 걸어서 탈출한 사람들, 버스를 타고 온 사람들도 있었고, 알미라 씨 가족처럼 차를 타고 온 사람들도 있었다. 15분간 페리를 타고 국경을 넘어 루마니아 도시 이사체아에 도착한 뒤에야 알미라 씨의 가족은 숨을 돌렸다. 미콜라이우에서 탈출한 뒤 12시간 만이었다.

알미라 씨 가족은 접경지역인 우크라이나 오를리브카에서 페리를 타고 루마니아 이사체아로 건너갔다. ⓒ 서현재
알미라 씨 가족은 접경지역인 우크라이나 오를리브카에서 페리를 타고 루마니아 이사체아로 건너갔다. ⓒ 서현재
알미라 씨의 아들 미하엘 씨가 가족들이 탔던 페리 사진과 루마니아 입국 사증이 찍힌 여권을 보여주고 있다. ⓒ 박시몬
알미라 씨의 아들 미하엘 씨가 가족들이 탔던 페리 사진과 루마니아 입국 사증이 찍힌 여권을 보여주고 있다. ⓒ 박시몬

루마니아 이사체아 국경검문소에는 우크라이나 피난민을 위한 텐트가 있었다. 출입국 사무소에서 입국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자원봉사자들은 알미라 씨의 가족에게 샌드위치와 커피, 차 등을 건넸다. 아이들을 위한 장난감과 담요, 옷도 제공했다. 두 시간에 걸친 입국 심사가 끝나자 밤 12시였다. 루마니아 수도 부쿠레슈티로 가는 버스의 운행은 이미 끝나 있었다. 다행히 루마니아의 봉사자들이 교회를 소개해줬다. 알미라 씨 가족은 하룻밤을 교회에서 보내고 다음 날 오후 1시에 부쿠레슈티로 가는 기차를 탔다. 그들은 오후 4시에 부쿠레슈티에 도착해 아들 미하엘과 재회했다.

공항이 있는 부쿠레슈티에 가기 전 하룻밤 머문 이사체아 교회에서 피난길에 지친 가족들이 쉬고 있다. ⓒ 알미라 텐
공항이 있는 부쿠레슈티에 가기 전 하룻밤 머문 이사체아 교회에서 피난길에 지친 가족들이 쉬고 있다. ⓒ 알미라 텐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알미라 씨의 가족은 루마니아 수도인 부쿠레슈티에서 한국 비자를 받기 위해 11일을 머물렀다. 지나(Zina)와 앙카(Anka)라는 이름의 두 자원봉사자가 그들을 도왔다. 지나는 우크라이나인, 앙카는 루마니아인이었다. 알미라 씨의 가족은 부쿠레슈티 사관학교 기숙사에서 지내게 됐다. 음식은 하루에 세 번씩 제공됐다. 소시지, 스프, 샌드위치 등이 나왔다. 알미라 씨 가족은 첫 날 부쿠레슈티 시내를 조금 둘러보긴 했지만, 밖에 나가고 싶지 않은 기분이라 거의 실내에서만 머물렀다. 그들은 휴대폰으로 이런저런 영상을 보거나, 서로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나, 두고 온 미콜라이우의 집, 그 집에 머물고 있는 유리 씨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으려 애썼다.

알미라 씨 가족들은 비자 발급이 될 때까지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에 머물며 봉사자들이 나눠준 밥을 먹으며 생활했다. ⓒ 리사 리카라타이
알미라 씨의 가족은 비자 발급이 될 때까지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에 머물며 봉사자들이 나눠준 밥을 먹으며 생활했다. ⓒ 리사 리카라타이
루마니아 봉사단체는 비자 발급이 진행되는 11일 동안 알미라 씨 가족이 머물 수 있도록 부쿠레슈티 사관학교 기숙사에 숙소를 마련해 제공했다. ⓒ 리사 리카라타이
루마니아 봉사단체는 비자 발급이 진행되는 11일 동안 알미라 씨 가족이 머물 수 있도록 부쿠레슈티 사관학교 기숙사에 숙소를 마련해 제공했다. ⓒ 리사 리카라타이

그들이 머물고 있던 기숙사에는 알미라 씨 가족 외에도 다른 우크라이나인 네 가족 정도가 더 머물고 있었다. 그들은 종종 지하실에서 대피했던 일, 이곳까지 탈출하게 된 과정 등을 서로 이야기했다. 그들은 전쟁이 끝날 때 까지 인근 나라에 머물며 일자리를 구할 예정이라고 했다. 루마니아와 슬로바키아, 폴란드는 우크라이나 피난민들에게 임시거주증을 발급해줬고, 아파트와 음식을 먼저 제공한 후 일해서 갚을 수 있게 하는 일자리 제공서비스도 지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모두에게 제공되는 것은 아니라서 우크라이나 피난민들은 주변국 난민촌에 머물며 차례가 오길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알미라 씨의 가족은 다른 경로를 택했다.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공항에서 한국 인천 공항으로 출발하던 날, 알미라 씨의 가족은 입국에 필요한 코로나 검사(PCR test) 등 수속을 밟았다. 3시간에 걸친 비행 후 카타르에 도착해 잠시 머물렀다. 그리고 8시간이 걸리는 비행길에 다시 올랐다. 3월 21일 오후 4시 35분, 마침내 알미라 씨를 비롯한 고려인 가족 6명은 무사히 한국의 땅을 밟았다. 아들 미하엘 씨는 6개월간 태양광판 조립하며 번 500만원을 가족의 비행기 삯으로 전부 사용했다. “살아서 무사히 가족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 다행”이라고 미하엘 씨는 나중에 말했다.

탈출 이후의 삶

한국은 1999년부터 ‘재외동포의 출입국과 법적 지위에 관한 법률’(재외동포법)을 시행하고 있다. 지난 3월 8일, 한국 정부는 재외동포법에 따라 우크라이나 동포 등에 대한 비자 발급 절차를 간소화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동포나 가족으로서 국내 입국한 적이 있는 사람의 경우, 동포 입증서류 없이 과거와 동일한 자격으로 비자를 발급받을 수 있다. 또 한국에 입국한 사례가 없더라도 동포라는 것만 입증되면 3년간 체류가 가능한 단기 사증(C-3)을 발급받는다. 3월 8일 이후 4월 19일 현재까지 100명이 넘는 고려인들이 우크라이나를 떠나 한국에 왔다.

당장의 전쟁에서 벗어났지만, 알미라 씨의 가족은 앞으로 한국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우크라이나에서 재산을 챙겨오지도 못했고, 그나마 한국에서 번 돈은 비행기 삯으로 썼다. 최근에 광주광역시에 형성된 고려인 마을 근처에 작은 숙소를 구했지만, 아이들 학교와 어른들의 일자리 문제가 걱정이다. 무엇보다 알미라 씨는 우크라이나에 홀로 남겨진 남편 유리 씨에 대한 걱정이 가장 크다고 했다.

4월 중순의 미콜라이우 상황은 알미라 씨가 떠나왔을 때 보다 악화하였다. 러시아는 전략적 요충지인 미콜라이우를 계속 공격하고 있다. 러시아군과 긴 대치로 인해 도시 안의 사람들은 고립되었고, 먹을 물조차 부족해진 상황이라고 유리 씨는 <단비뉴스> 인터뷰에서 전했다. 그 와중에도 유리씨는 다른 피난민들에게 집의 절반을 제공해 함께 살고 있다. 유리 씨가 손수 지은 집에는 지금 10명의 피난민이 머물고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공습경보와 포탄 소리가 들리지만, 유리 씨는 이제 더 이상 지하실로 내려가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이제 힘이 없고, 노쇠했다. 영상통화를 하면서 본 유리 씨의 얼굴은 많이 지쳐 보였다.

러시아의 계속된 공격으로 고립된 미콜라이우 시에서는 식수마저 바닥났다. 빗물을 퍼서 사용하거나 강물을 마시고 있는 현장을 우크라이나에 머물고 있는 사진가 Libkos씨가 찍어 인터넷에 공유했다. ⓒ libkos
러시아의 계속된 공격으로 고립된 미콜라이우 시에서는 식수마저 바닥났다. 빗물을 퍼서 사용하거나 강물을 마시고 있는 현장을 우크라이나에 머물고 있는 사진가 Libkos씨가 찍어 인터넷에 공유했다. ⓒ libkos
가족들과 떨어져 미콜라이우에 홀로 남은 유리 씨가 단비뉴스와 화상통화를 하고 있다. ⓒ 서현재
가족들과 떨어져 미콜라이우에 홀로 남은 유리 씨가 단비뉴스와 화상통화를 하고 있다. ⓒ 서현재

“우리 고려인들은 전쟁이 나면 항상 어딘가로 가장 먼저 쫓겨난다”고 알미라 씨는 말했다. 힘이 없고 약한 민족이라는 이유로 알미라 씨의 가족은 4대를 이민자로 살았다. 평생을 살았던 집, 같은 추억을 공유했던 우크라이나 고려인 이웃들, 그리고 사랑했던 남편과 강제로 이별 당한 알미라 씨는 말했다. 손주인 유리와 아나가 어른이 되면, 그때가 되면, 살던 곳에서 내쫓기는 인생을 그들이 살게 되지 않길 바란다고, 그런 날이 오기를 꿈꾼다고, 알미라 씨는 말했다.

2022년 2월 24일(이하 한국 시각),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각 나라 언론인들은 전쟁 현장에 달려갔다. 실체를 직접 목격해야 진실을 제대로 보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대다수 국내 언론은 외신 번역에 매달리고 있다. 몇몇 언론이 한국 외교부의 허가를 받아 2~3일 정도 현지를 살펴 보도했지만, 전쟁의 참상을 있는 그대로 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단비뉴스>도 그 현장에 가진 못했다. 다만, 다양한 방식으로 우크라이나인들을 직접 접촉하여 그들과 그 가족·친구·동료가 목격한 전쟁을 기록하고 보도한다.

기부 캠페인도 시작한다. 자신의 ‘이름’과 ‘휴대전화 뒷번호 8자리’를 송금 메모에 적어, 신한은행 100-034-615484(사단법인 단비)에 기부금을 보내면, 인도적 지원을 위한 특별 모금 활동을 진행 중인 주한 우크라이나 대사관에 전달한다. 기부자의 면면과 전달 과정도 보도할 예정이다.

<단비뉴스>는 일련의 보도와 연대 행동을 ‘메르 라솜 – 다함께 평화’라고 부르기로 했다. 우크라이나 말로 '메르'(мир, myr)는 '평화', '라솜'(разом, razom)은 '함께'를 뜻한다. 우크라이나에 평화가 찾아오는 날까지 보도와 행동을 이어가겠다. 연재 기사 및 기부 캠페인과 관련한 제보, 제안, 문의 등은 전자우편 jennsis@naver.com에서 받고 있다. (편집자)

[메르 라솜(мир разом), 다함께 평화] 연재 보기

① 포탄에 숨진 할머니, 입대하는 아버지

② 폭격에서 살아남은 우크라이나 중위

③ 정든 고향을 빼앗긴 우크라이나 역사 선생님

④ 드론전의 한복판에서 무기 기다리는 장교

⑥ 우크라이나 현장을 취재한 한국인 사진가

관련기사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