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현장] 1001 동물권리장전행진

‘고통과 착취의 상황에서 구조될 권리’

‘보호받는 집, 서식지 또는 생태계를 가질 권리’

‘법정에서 권익이 대변되고, 법에 의해 보호받을 권리’

‘인간에게 착취, 학대, 살해당하지 않을 권리’

‘소유되지 않고 자유로워질 권리, 또는 그들의 권익을 위해 행동하는 보호자가 있을 권리’

지난 1일 서울 강남역 11번 출구 앞. ‘동물권리장전’(Animal Bill of Rights)의 5개 조항이 각각 적힌 만장 10개가 범선의 돛처럼 바람을 버티며 서 있었다. 그 앞으로 검은색과 붉은색 옷을 입은 남녀 200여 명이 각각 한 손에 장미 모양 조화를 들고 야외무대를 바라보고 앉아있었다. 대부분 청년층이었으나 한 아이는 유모차를, 다른 아이는 목말을 태운 젊은 아빠도 보였다. 색연필과 사인펜으로 ‘조종당하지 않고 자유로울 권리’ 등을 쓴 손팻말을 들고 참여한 초등학생들도 있었다. 반려견을 데리고 온 참가자들도 몇 명 눈에 띄었다.

도살장 가축의 처지에 공감하는 시설 장애인

동물해방공동체 직접행동디엑스이(DxE: Direct Action Everywhere-Korea)가 주최한 ‘1001 동물권리장전행진’은 오후 1시 15분 이 단체 활동가 은영(활동명)의 소개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박경석 대표가 등장하면서 시작됐다. 박 대표는 박노해 시인의 ‘노동의 새벽’을 개사한 ‘탈시설의 새벽’을 절절하게 불렀다.

“우릴 가두지 마십시오~. 우릴 죽이지 마십시오~.”

지난 1일 오후 서울 강남역 11번 출구 앞에서 ‘1001 동물권리장전행진’ 참가자 2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장애인차별철폐연대 박경석 대표가 ‘탈시설의 새벽’을 부르고 있다. 목은수 기자
지난 1일 오후 서울 강남역 11번 출구 앞에서 ‘1001 동물권리장전행진’ 참가자 2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장애인차별철폐연대 박경석 대표가 ‘탈시설의 새벽’을 부르고 있다. 목은수 기자

연대 발언에 나선 전장연 유진우 활동가는 “동물들이 도살장에 끌려가 죽음을 기다리는 삶과 장애인이 시설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삶이 맞닿아 있다”며 “배제와 멸시 가득한 사회에서 ‘지우는 존재’를 드러내는 활동을 함께 하자”고 힘주어 말했다.

외국인보호소폐지를위한물결(IW31: International Water31)의 아정(활동명) 활동가는 “외국인 보호소는 체류 기한이 지난 이주민 난민 신청자들을 창문도 없는 방에 길게는 5년까지 주구장창 가두는 구금시설”이라며 “인권 친화적인 시설이 없듯이 동물 친화적인 시설도 없다”고 외쳤다. 그는 “감금은 누군가의 삶을 침범하는 아주 오래된 폭력”이라며 “산업화된 죽음의 시설에 갇혀 있는 동물들과 연대한다는 것은 끊어져 버린 우리들의 연결감을 회복하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성노동자해방행동주홍빛연대 차차의 여름(활동명) 활동가는 “죽어도 된다고 여겨지던 몸들이 죽지 않겠다고 저항하는 싸움이라는 점에서 성노동자 해방을 비롯한 수많은 사회운동과 동물 해방은 연결되어 있다”고 말했다.

연대 발언에 나선 전국장애인철폐연대 유진우, 외국인보호소폐지를위한물결 아정, 성노동자해방행동주홍빛연대 차차의 여름 활동가. 목은수 기자
연대 발언에 나선 전국장애인철폐연대 유진우, 외국인보호소폐지를위한물결 아정, 성노동자해방행동주홍빛연대 차차의 여름 활동가. 목은수 기자

돼지에게 ‘6개월 이후의 삶’을 허락하지 않는 인간

‘새벽이생추어리’(sanctuary:보금자리)의 영인(활동명) 활동가는 “돼지가 도축되는 나이인 6개월 이후의 삶을 허락하지 않는 사회에서 새벽이는 건강하게 3살을 맞이했다”고 말했다. 새벽이는 직접행동DxE 활동가들이 2019년 한 종돈장에서 도살 전에 구조한 돼지다.

“종돈장에서는 더 많은 수익을 내기 위해 아기 돼지의 꼬리를 자르고 송곳니를 뽑는데 그 흔적이 어른이 된 새벽이에게도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새벽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짧아진 꼬리를 흔들며 다시 튼튼하게 자라난 송곳니로 풀을 뜯어 먹습니다.”

죽임당할 위기의 돼지를 구출하는 일은 현행법상 절도에 해당한다. 그래도 활동가들은 구조라는 개념을 고수한다. 현재 새벽이생추어리는 제약회사에서 실험동물로 길러지다가 머리를 다쳐 버려진 돼지 ‘잔디’도 보호하고 있다. 영인 활동가는 “타자의 고통에 무감해진 채 공존하는 법을 알 수 없게 된 인간 동물은 종 차별의 피해 동물들보다도 존엄을 잃은 것 같다”고 말했다.

새벽이생추어리의 영인 활동가가 종돈장에서 구조된 뒤 건강하게 3살을 넘긴 돼지 새벽이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목은수 기자
새벽이생추어리의 영인 활동가가 종돈장에서 구조된 뒤 건강하게 3살을 넘긴 돼지 새벽이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목은수 기자

횟집과 햄버거집 앞에서 ‘동물권’을 외치다

연대 발언이 끝난 오후 2시 무렵, 강남역에서 서초역까지 약 2.5킬로미터(km) 구간의 행진이 시작됐다. ‘동물권리장전’ 글씨가 한자씩 적힌 검은색 팻말을 든 사람들이 맨 앞에서 걸었다. 그 뒤로 만장을 든 일행이 따랐다. 스피커에서는 ‘모든 동물 자유로울 때까지’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둠둠베이비의 노래 ‘지금 당장 동물해방’이 울려 퍼졌다. 참가자들은 빨간색 스프레이 칠이 된 플라스틱 통을 음악에 맞춰 두드리며 서초역 부근 대법원 앞까지 행진했다.

200여 명의 집회 참가자들이 지하철 2호선 강남역에서 출발, 두 정거장 떨어진 서초역으로 행진하고 있다. 목은수 기자
200여 명의 집회 참가자들이 지하철 2호선 강남역에서 출발, 두 정거장 떨어진 서초역으로 행진하고 있다. 목은수 기자

참가자들은 행진 도중 한 횟집과 햄버거집 앞에서 두 차례 멈췄다. 햄버거집 앞에서 마이크를 잡은 DxE활동가이자 둠둠베이비 가수 김고양(활동명) 씨는 “세상 어떤 존재도 살해당하고 학대당하기 위해 태어나지 않는다”고 외쳤다.

“오늘 우리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동물을 사랑하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채식을 하자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세상 어떤 육식 동물도 다른 동물들을 수천, 수만, 수억씩 살해공장에 가둬놓고 강간시키고, 억지로 태어나게 만들고, 비대하게 살찌우고, 채 청소년 나이가 되기도 전에 학살하고,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지 않습니다.”

강남역과 교대역 중간의 길마중1교에서는 동물권리장전이 적힌 붉은색 대형 현수막을 고가도로 아래 차도 쪽으로 10분가량 펼치기도 했다. 경찰은 혹시 모를 충돌에 대비해 약 20명의 병력을 가게 앞에 추가로 배치하기도 했다.

대법원 앞에서 ‘피 흘리고 쓰러지는’ 퍼포먼스

대법원 정문에 도착한 참가자들은 각자 준비해 온 붉은색 끈을 하늘을 향해 던진 뒤 그 자리에 죽은 듯 드러누웠다. 동물의 핏줄기를 상징하는 끈을 던지면서 도살장에서 죽은 동물을 연기한 것이다. 은영은 DxE 활동가들의 업무방해 혐의를 심리 중인 대법원을 향해 “어떠한 선례를 남기더라도, 그 선례가 얼마나 무거운 것이었는지 깨닫게 될 것”이라고 외쳤다.

DxE 활동가들은 2019년 10월 4일 세계 동물의 날을 맞아 경기도 용인시에 있는 한 도계장의 입구를 막는 시위를 벌였다. 활동가 4명이 대형 여행가방 안에 콘크리트 약 200킬로그램(kg)을 붓고 자신들의 손을 결박한 뒤 닭을 실은 트럭이 도살장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은 것이다. 트럭은 약 4시간 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국내 최초의 ‘동물권 락다운(lock down) 시위’였다. 활동가들은 업무방해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1, 2심에서 모두 1인당 300만 원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은 현재 대법원에서 심리 중이다.

1001 동물권리장전행진 참가자들이 서울 서초동 대법원 정문 앞에서 붉은색 끈을 던진 뒤 바닥에 누워 도살장을 재연하고 있다. 목은수 기자
1001 동물권리장전행진 참가자들이 서울 서초동 대법원 정문 앞에서 붉은색 끈을 던진 뒤 바닥에 누워 도살장을 재연하고 있다. 목은수 기자

DxE활동가 은영은 <단비뉴스> 인터뷰에서 “이번 동물권리장전행진을 통해 판결을 앞둔 대법원에 직접행동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규모와 기개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합법이 정의라고 여겨지기 쉽지만, 역사적으로 법은 늘 바뀌어왔다”며 “직접행동DxE의 목표는 단순한 동물해방이 아니라 동물권리장전이라는 동물의 기본법을 제정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대법원 앞에서 5분가량 도살장을 재연한 참가자들은 오후 4시쯤 단체 사진을 찍고 집회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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