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비평]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한 여자가 사랑하는 남자를 따라 택시를 탄다. 결혼을 반대하는 아빠를 뒤로하고 고향을 떠난다. 새롭게 정착한 미국에서 세탁소를 개업하고, 딸을 낳고, 그렇게 행복하게 잘살았다. 아니, 그렇게 행복하게 잘 살았다면 좋았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현실은, 온 힘을 다해 산다 해서 반드시 그에 걸맞은 결과가 나오는 건 아니다. 어느새 중년이 된 여자는 모든 것에 실패한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인다. 세무 조사원은 영수증을 꺼내들며 가게 운영과 상관없어 보이는 노래방 기계를 산 이유를 묻는다. 필요해서 산 물건이라는 증명을 하지 못하면 세탁소를 압류하겠다고 다그친다. 노쇠한 아버지의 생신 잔치 준비도, 레즈비언 딸과의 다툼도, 남편이 품고 있던 이혼 서류도 여자를 지치게 한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포스터. 다중 우주 세계관을 통해 삶 속 허무를 딛고 나아가는 인물들의 고군분투를 담았다. 출처 워터홀컴퍼니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포스터. 다중 우주 세계관을 통해 삶 속 허무를 딛고 나아가는 인물들의 고군분투를 담았다. 출처 워터홀컴퍼니

미국에 이민 온 중국계 중년 여성 에블린(량쯔충)은 세탁소를 운영하며 매일 똑같이 도는 세탁기 같은 나날을 보낸다. 그때 에블린 앞에 남편 웨이먼드(케 후이 콴)와 똑같이 생겼지만, 훨씬 강하고 똑똑한 또 다른 웨이먼드가 나타난다. 그는 다른 우주에서 살고 있는, 일명 알파 웨이먼드다. 느닷없이 나타난 알파 웨이먼드는 에블린에게 우리가 ‘다중 우주'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인생의 기로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 때마다 새로운 우주가 탄생한다는 설명 앞에 에블린은 혼란스럽다.

사람들은 흔히 ‘그때 만약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지금은 어떤 인생을 살고 있을까?’ 하는 상상을 하곤 한다. 인생에서 만나는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서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다면 다행이다. 그러나 많은 이가 최선보다는 잘해야 차선, 못해도 차악 정도를 선택한 것 아닐까 의심하게 된다. 결국 ‘다른 선택을 했다면 더 나은 내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가정을 마음에 품고 산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그 가정을 알고리즘처럼 연결되는 다중 세계로 풀어냈다. A를 선택했다면 그 선택의 결과로 하나의 우주가, B를 선택했다면 역시 그에 따른 또 다른 우주가 펼쳐진다. A와 B를 선택한 자신은 서로 다른 모습으로 여러 세계에서 존재한다. 이 다중 우주 전체를 위협하는 악당 '조부 투바키'가 지금 에블린을 찾고 있다. 이유는 모른다. 평범한 주부였던 에블린은 조부 투바키에게서 살아남아 우주를 구할 수 있을까?

선택지마다 열리는 다중 우주 알고리즘

선택에 따라 성공한 인생이 된 우주와 실패한 인생이 된 우주가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다중 우주 세계. 에블린이 만약 웨이먼드를 따라 가지 않았다면 선택할 수 있었던 화려한 여배우의 삶을 보여준다. 출처 워터홀 컴퍼니
선택에 따라 성공한 인생이 된 우주와 실패한 인생이 된 우주가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다중 우주 세계. 에블린이 만약 웨이먼드를 따라 가지 않았다면 선택할 수 있었던 화려한 여배우의 삶을 보여준다. 출처 워터홀 컴퍼니

다중 우주론은 다른 세계에서 사는 자신이 지금 이 세계에서 사는 나보다 더 나은 인생을 살고 있다는 점에서 위로와 허무를 동반한다. 지금 이 우주 속 내 삶이 망했을지라도 다른 우주 속 나는 성공했을 가능성이 다행스레 여겨지는 동시에 슬퍼지니 말이다. 영화 속 동시대 최고의 스타가 되어 레드 카펫을 걷는 내가, 새끼손가락 하나로 사람을 튕겨버리는 쿵푸 고수인 내가 이미 어딘가에서 잘 살아가고 있는데, 구질구질한 세무 조사와 성격 괴팍한 딸과 이혼 타령하는 남편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러나 구질구질한 인생이 있기에 역설적으로 빌려올 능력이 많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서 에블린은 '버스 점프'(verse jump)를 통해 다중 우주에 있는 또 다른 나와 접속한다. 그 과정에서 또 다른 내가 가진 능력을 그대로 가져올 수 있다. 다른 우주에서 내가 요리사라면 요리 기술을, 무술인라면 무술 능력을 순식간에 가져와 익힐 수 있다. 그런데 이 기술을 빌려오는 데도 제약이 있다. 다중 우주에 존재하는 나의 존재만큼 능력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이다. 자신의 인생을 실패한 것으로 여기는 현실의 에블린이 특별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선택의 순간마다 후회가 남는 선택을 반복해왔던 에블린은 다른 우주에 있는 여러 에블린보다 못한 최악의 존재가 됐다. 삶을 실패로 이끈 선택들 덕분에 오히려 에블린에게 풍성한 다중 우주가 존재한다. 빌려올 능력이 무궁무진하니, 성장할 가능성이 가장 큰 셈이다. 순탄한 삶을 살아 온 사람에게는 없는 능력이다.

온 우주의 악당 조부 투파키가 된 딸 조이. 악당이 된 딸과 히어로가 된 엄마 간 대결을 통해 폭력의 액션물이 아닌 화해의 액션물을 새롭게 보여준다. 출처 워터홀 컴퍼니
온 우주의 악당 조부 투파키가 된 딸 조이. 악당이 된 딸과 히어로가 된 엄마 간 대결을 통해 폭력의 액션물이 아닌 화해의 액션물을 새롭게 보여준다. 출처 워터홀 컴퍼니

성장하려면 실패해야 한다는 뻔한 말을 이 영화는 평범한 엄마에서 SF장르 영화의 히어로로 점점 성장해가는 에블린으로 풀어낸다. 에블린은 자신과 전 우주를 위협하는 악당 조부 투파키가 알고 보니 딸 ‘조이’(스테파니 수)라는 사실과 마주한다. 모든 다중 우주 속에 존재하는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하든 인생은 허무하다는 걸 깨달은 뒤 조이는 악당 조부 투바키가 됐다. 세계를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력한 자신을 파괴하고 싶어 만든 블랙홀 ‘베이글’ 안으로 같이 걸어가자고 엄마 에블린에게 손을 내민다. 에블린은 조이와 함께 허무 속으로 걸어갈까, 맞서 싸울까. 여러 우주 중 가장 최악의 선택만 했던 에블린이 이번엔 가장 최고의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삶 속 허무와 싸우는 방법을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보여준다. 성공한 인생이나 실패한 인생이나 다 마찬가지라는 허무함에 쉽게 굴복하지 않는 것이다.

다정함이 우주를 구한다

내가 아는 유일한 것은 우리가 다정해야 한다는 거예요. 제발, 다정하게 대하세요. 특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를 때 말이에요.

남편 웨이먼드는 가족과 세탁소 손님 모두에게 친절하다. 남편의 친절이 무기력한 현실과 만날 때마다 에블린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 힘도 없는 다정과 친절이 거친 세상을 살아가는 데 쓸모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평소 여기저기 가짜 눈알을 붙여대는 웨이먼드의 웃기지도 않는 장난이 그래서 에블린에게 더 거슬렸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웨이먼드가 세상과 가족에 베푸는 유머와 친절과 다정은 허무함에 못 이겨 자신을 파괴하고픈 딸 조이를 구하는 대안으로 자리 잡는다. 삶은 순간으로 점 찍혀 완성된 점묘화다. 순간 순간을 허무해지지 않도록 서로에게 다정해진다면, 삶도 허무에서 구출된다. 허무에 빠져 베이글 안으로 들어가려는 조이를 에블린은 꼭 끌어안는다. 그리고 사랑한다고 말한다.

웨이먼드의 다정함을 상징하는 가짜 눈알을 이마 한가운데에 붙이고 악당들과 맞서기 위해 떠나는 에블린. 폭력이 아닌 친절이 세상을 구할 수 있는 무기라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출처 워터홀 컴퍼니
웨이먼드의 다정함을 상징하는 가짜 눈알을 이마 한가운데에 붙이고 악당들과 맞서기 위해 떠나는 에블린. 폭력이 아닌 친절이 세상을 구할 수 있는 무기라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출처 워터홀 컴퍼니

영화 후반부에 이르러 조이의 명령을 따르는 여러 사람이 달려와 에블린을 공격하려 한다. 그때 에블린은 세무 조사원의 말을 떠올린다. 웨이먼드가 끝까지 영수증 증명 날짜를 연기해달라고 대화를 청해 세무 조사원인 자신의 선의를 이끌어냈다고. 쓸데없다고 치부한 웨이먼드의 다정함이 결국 세무 조사 기일을 미뤄 세탁소 압류를 막은 것이다. 에블린은 점프 버스로 무술 능력을 가져오기보다 웨이먼드의 다정함을 빌려오기를 선택한다. 남편이 장난 삼아 눈알을 붙이곤 했던 것처럼 자신의 이마 정중앙에 눈알을 붙이고 악당들에게 다정함을 베푼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폭력에 친절로 응수하며 싸움이 아닌 화해의 액션을 화려하게 보여준다. 에블린은 버스 점프로 악당 개개인이 빌었던 소망을 들어주며 그들을 포옹한다. 악당들이 좀 더 세상에 다정해질 수 있도록. 모두가 다정해져서 허무한 세상이 되지 않도록. 모두의 각기 다른 우주가 충돌하더라도 그 혼란을 이해하고 껴안으려는 노력을 계속해서 할 수 있도록. 그 시도만이 서로를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에블린은 보여준다.

삶의 거대한 무의미를 받아들이면서도 사랑과 친절, 이해를 놓지 않으려는 태도는 절망에 굴복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영화는 에블린이 단순하지만 실현하기 어려운 진리를 이해하는 ‘제3의 눈’을 뜨는 과정이기도 하다. 서로를 할퀴며 싸우기보다 화해하고 나아가는 방법을 제시하는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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